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순왕후(조선 단종)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민담에 따르면 정순왕후 송씨는 [[단종(조선)|단종]]이 유배된 후에 결국 출가했으며[* 청룡사라는 [[절(불교)|절]]에서 지냈다고 한다. 현재 [[종로구]] [[창신동]]에 있다.], 단종이 죽은 후엔 무척이나 슬퍼해 매양 앞산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한다.[* 현재 [[낙산]] 줄기의 [[종로구]] [[숭인동(종로구)|숭인동]] 동망산 동망봉(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)이 그곳이며, 2008년부터 정순왕후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. 또한 이 근처를 정순왕후 유적지로 지정해 놓았다. 대중교통으로는 [[서울 지하철 6호선]] [[창신역]]이 가깝다.][* [[달동네]]를 [[재개발]]하면서 지은 보문자이파크뷰 시공사에서 정순왕후와 산신령을 모시던 산신각도 재건축했는데, 규모는 전보다 화려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남향으로 짓는 만행을 저질렀다. 본래 [[이홍위|단종]]의 귀양지인 [[강원도]] [[영월군]]을 바라봐야 의미가 있다. 또한 강신목인 [[은행나무]]도 복원되지 않았다.] [[청계천]]의 [[영도교]]가 그녀와 단종이 헤어진 다리라고 하며, 이를 소재로 [[김별아]]가 <영영이별 영이별>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. 사실 [[신숙주]]가 폐서인된 정순왕후를 [[첩]]으로 삼았다거나 [[노비]]로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. [[사육신]] 사건과 같은 반정이 터지면 관련 부녀자들은 노비가 되는데, 이중 직접 관련 인물들은 관노도 아니고 대신들에게 사노비로 하사한 사례가 특히 조선 초기에는 많았다. 때문에 [[사육신]] 사건 이후에도 그 부녀들이 대신들에게 하사되었는데, 그 목록이 모두 [[조선왕조실록]]에 기록되어 있다. 신숙주에게 내려진 것은 최면의 누이 선비와 조완규의 아내 소사와 딸 요문뿐이었다. 만에 하나라도 정말 저런 청을 했다면,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 그야말로 미친듯이 까였을 것이다. 안 그래도 [[숙주나물]] 소리를 들으며 [[인간 말종]]으로 취급받는 판국이다. 조선 말 3대 문장가로 꼽히는 [[김택영]]이 쓴 역사서 '한사경'[* 김택영이 [[중국]]에 망명 간 이후에 쓴 책으로, 조선 역사에서 저자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에 대해서 비판해서 논란이 되었다. 워낙에 자의성이 강해서 김택영 본인도 이걸 역사책이라고 단언하지 못하고 '경'을 추가로 붙인 것. 단적으로 이 책에서는 [[태조(조선)|태조 이성계]]의 [[조선]] 건국을 '''고려에 대한 찬탈로 기록'''해서, 김택영은 사적(史賊)으로 낙인 찍혔다. 당연히 세조의 집권도 비판 대상이었기 때문에 쓰여진 것이 본문 내용이다.]에 "좌의정 [[신숙주]]가 노산군의 부인(정순왕후)을 노비로 삼고자 주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"는 대목이 나온다. 그는 "[[세조(조선)|세조]]가 조카를 죽이고 여러 아우들을 살해하여 임금의 지위를 훔친 것도 사악한데 (신숙주가) [[단종(조선)|단종]]의 부인을 노비로 삼겠다고 청한 것은 매우 간사하고 악한 짓"이라고 평했다. 물론 김택영의 저 기록은 전혀 문헌상 근거가 없기 때문에, 학계에서는 무시당한다. 신숙주의 평가가 얼마나 떨어지고, 이후 신숙주를 비판하는 문학작품들이 나오는 계기 중 하나로 평가 받을 뿐이다. 기록 상으로는 [[세조실록]] 9권, 세조 3년 10월 24일 갑인 3번째 기사에 따르면 한편 '''[[세종대왕]]의 부마로 정현옹주의 남편인 윤사로는 공신이 되자 송현수의 딸을 상으로 받기를 원하였다'''고 한다. 세조 8년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ga_10308016_001|3월 16일 기사]]를 보면 '''자녀들'''이라는 표현이 나오고, 10월 24일 기사에도 "송현수(宋玹壽)의 아내는, 노산군(魯山君)의 아내를 위하여 그 죄를 용서하고, '''그 밖의 딸들'''은 역시 당연히 공신(功臣)에게 주어야 하는데" 라는 표현이 나온다. 앞선 기사에서 송현수는 관노가 되었고 그 일가도 같이 살고 있었는데, 그 가족들을 공신들이 나눠먹고 싶다고 욕심 부리는 내용이지만 그 와중에도 노산군비의 모친이라는 이유로 송현수의 아내는 풀어주라는 청원이다. 이걸 노산군비를 달라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다. 송현수의 다른 자손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.[* 송현수의 자녀로 기록에 남은 것은 본 인물과, [[자을산군|성종]]대에 과거를 치를 수 있게 허락 받은 송거뿐이다. 딸이라고 하면 1명뿐이라고 착각해서 적히는 내용이다.] 또한 정순왕후 관련 [[야사(역사)|야사]] 중 한경지략[* 조선 후기 [[정조(조선)|정조]] 연간에 [[한성부]]의 역사와 모습, 지명 등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며 저자는 수헌거사(樹軒居士)라는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는데, [[유득공]]의 아들 유본예로 추정된다.]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지금의 [[청계천]] 영도교[* 단종이 [[영월]]로 유배갈 때 이 다리에서 정순왕후와 이별한 뒤 다시는 만나지 못하고 영영 헤어졌다 해서 '영이별 다리', '영영 건넌 다리'라고 불렸다. 현재의 영도교는 2005년 [[청계천]]이 복원될 때 새로 가설된 것이다.] 인근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는데, 이 시장의 유래도 정순왕후에 얽힌 이야기다. 정순왕후를 가엾게 여긴 인근의 여인네들이 정순왕후의 집에 끼니거리를 가져다 주었는데[* 끼니거리를 가져다 주는 여인들이 어찌나 많이 찾아왔던지, 나중에는 아예 긴 행렬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.],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 일을 금지해 버렸다. 그러자 여인들은 꾀를 내어 정순왕후의 집 근처에 남자들이 들어올 수 없는 여자들만의 작은 [[채소]] 시장을 열어 채소를 파는 척 하면서 먹을 것들을 모아 정순왕후에게 몰래 가져다 주었고, 이것이 후에 영도교 인근에 생긴 금남(禁男)의 채소시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다. 다만 정순왕후는 출가하지 않았고 지금의 동대문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, [[경혜공주]]의 아들로 그녀에게는 시조카가 되는 [[정미수]]가 수양아들로 들어오면서 [[정미수]]의 집에 거주하였고,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고 한다. 무척 장수해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[[중종(조선)|중종]] 16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. '''조선 역대 임금 중 2번째로 단명한 국왕'''인 남편[* 가장 단명한 국왕은 10세의 나이로 죽은 추존왕 [[효장세자|진종]]. 그러므로 재위한 임금 중 가장 단명한 왕은 단종이다.]과는 대조적으로,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'''조선 역대 왕비 중 2번째로 장수한 왕비'''다.[* 참고로 제일 장수한 왕비는 '조 대비'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[[신정왕후]] 조씨. 사실 신정왕후도 실제로는 세자빈에서 바로 대비로 격상된 상황이라 정순왕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[[왕비]] 노릇은 거의 하지 못했다. 화려해 보이는 왕후의 삶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고 고생스러운 것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.][* 하지만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정순왕후는 동냥에 염색업 등 갖가지 고된 일로 생계를 이어 나갔던 터라, 정순왕후의 장수를 왕후의 삶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의지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. 위에 언급된 소설 <영영이별 영이별>에서도 '살아남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복수였습니다'라는 구절이 있다.] 즉, 세조의 큰아들 [[의경세자]](덕종)가 요절하고 뒤이어 [[세조(조선)|세조]], [[예종(조선)|예종]], [[성종(조선)|성종]]의 치세를 거쳐 세조의 증손자인 [[연산군]]이 [[한명회]]를 부관참시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행각을 벌이다가 폐위된 것, 세조의 또 다른 증손자인 [[중종(조선)|중종]]이 즉위해 첫 번째 아내 [[단경왕후]] 신씨를 내쫓고 2번째 아내 [[장경왕후]]와 사별한 뒤 3번째 아내 [[문정왕후]]와 혼인하는 것까지 모두 보고 죽은 것이다.[* 아이러니하게도 문정왕후는 계유정난의 조력자이자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가문인 [[파평 윤씨]] 가문이었으며 문정왕후의 시어머니인 [[정현왕후]] 윤씨 역시도 파평 윤씨이다. 덤으로 세자 인종의 친어머니 [[장경왕후]] 역시도 파평 윤씨이다. 어찌보면 정순왕후는 본인에게 있어서 세조 못지 않은 원수이기도 한 파평 윤씨 가문의 왕비와 그 소생들이 왕실에 들어앉아 있는 상황에서 말년을 보낸것이기에 속 편한 말년을 보내지는 못한 것이다. 그나마 죽은 정순왕후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문정왕후 윤씨를 끝으로 조선 초기에 왕비 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한 파평 윤씨 가문은 선조 즉위 후 멸망때까지 왕비 자리를 두 번 다시 차지하지 못했다.][* 추가적으로 명종의 며느리이자 문정왕후의 손주며느리인 [[공회빈 윤씨]]는 모친은 파평 윤씨인 무송 윤씨인데 세자빈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[[임진왜란]] 직전에 죽어서 직후 왜란의 여파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되었다.] 죽을 당시 세자였던 [[인종(조선)|인종]]은 그의 먼 증손자뻘이 된다. 정순왕후 송씨는 여막에서 동냥을 하고 [[염색]]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.[*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염색업은 '''정말로 힘든 막노동'''이다. [[왕비]]였던 [[양반]]가 여성이 동냥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야했다는 것은 세조의 탄압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며 후에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말년의 변덕이란 느낌도 없지않아 있다.][* 다만 [[세조(조선)|세조]] 사후엔 하지 않았을 듯하다. [[성종(조선)|성종]] 즉위 이후 대비가 된 [[정희왕후]]가 의식을 공급해줄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.] [[낙산]]에 정순왕후가 천을 염색할 때 사용했다는 자주동천이 있는데, 전설에 따르면 정순왕후가 물에 천을 넣자 천이 저절로 자주색으로 물들었다고 한다.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[[수양대군|세조]]의 도움은 끝까지 거부했다. 세조는 그녀를 노비로 전락시켜 버렸지만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. 그녀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죽기 얼마 전, [[중종(조선)|중종]]이 노산군의 묘지를 찾아 봉분을 세우고 [[제사]]를 지내라는 명이 내려졌다.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 [[단종(조선)|단종]]과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. 그녀의 장례는 나라에서 대군부인의 예로 치렀는데, 정작 단종이 대군의 지위로나마 복위된 것은 그보다 160년 지난 1681년 [[숙종(조선)|숙종]] 때이다. 만일 그녀가 생존했다면, 예종 대 - 성종 대 - 연산군/중종 대에 이르기까지 대왕대비 추봉을 3번은 받았을 세월이었다. 그녀의 무덤은 [[경기도]] [[남양주시]] 진건읍에 있는 [[사릉]](思陵)이다.[* 정순왕후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[[세조(조선)|세조]]도 죽은 후 오늘날 [[남양주시]]에 묻혔는데, 세조와 [[정희왕후]] 내외가 묻힌 광릉은 남양주 진접읍에 있다.]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(思)한 그녀의 일생에 걸맞는 능호. [[경춘선]]의 [[사릉역]]은 그녀의 이 능호에서 유래한다. 다만 사릉에는 사릉역보다 그 다음역인 [[금곡역(경춘선)|금곡역]]이 더 가깝다.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에는 시자부(媤姉夫) 격인 [[정종(부마)|정종]]의 집안인 해주 정씨 가문에서 그녀의 무덤을 관리해 주었다. 현대에도 사릉 인근에는 해주 정씨 집안의 개인묘들이 들어서 있다. 현대에 들어와서 "단종과 정순왕후를 합장해야 한다"는 주장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지만 흐지부지.[* 일반적인 무덤도 파묘하고 이장하는 게 큰일 중 하나인데, 그 대상이 문화재인 '''왕릉'''이라면 더 말할 게 없다. 애초부터 가능성이 없었다.] 사릉에 심어진 [[소나무]]들[* [[문화재청]] 관할 하에 있는 사릉 내 양묘사업소에서 궁궐과 능원에 필요한 소나무를 기르고 있다. 따라서 현재 사적지에서 자라는 어린 소나무들은 대부분 사릉 출신이라고 볼 수 있다. 다만 나무의 생장을 위해 사릉은 일반인에게는 비공개로 유지되고 있다.]은 하나같이 가지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왕후가 남편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라 하여 [[1999년]] 4월 9일 사릉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하나를 장릉에 옮겨 심고 '정령송(精靈松)'이라 명명했다. 사후 478년만이다. 세조의 아내 [[정희왕후|자성대왕대비]]가 [[성종(조선)|성종]] 즉위 후 [[수렴청정]]을 하게 되자 정순왕후에게 의식을 공급해주도록 명했고, [[경혜공주]]의 남편 정종과 [[세종대왕]]의 후궁 [[혜빈 양씨]][* 단종의 [[유모]]이기도 해서 단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. [[계유정난]] 이후 단종 세력을 숙청하려는 세조에게 희생당한다.]의 자손들을 복권시켜 줬다. 아마도 선왕의 비인 자신이 살아있을 때 어느 정도 물꼬를 터놔야만 나중 임금들이 "후속 조치"를 수월히 취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. [[조선/역대 왕비]] 중 처음으로 국왕과 혼인한 왕비이기도 하다. 태조부터 세종까지는 잠저 시절에 혼인했으며, 문종의 비 [[현덕왕후]]는 아직 세자빈이었을 때 사망하여 남편이 즉위한 이후 왕비로 추증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